어느 날 컴퓨터를 켜고 손이 가는 대로 홈페이지를 열어 방문해 보니 정교한 달걀 하나가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래에는 백합과 초콜릿으로 만든 토끼들이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곧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부활절의 유래에 대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넘겨 예수님이 법정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의 법률에 근거하면 토요일은 안식일이어서 모든 활동을 다 금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금요일 해가 저물기 전에 그리스도의 시신을 간단하게 무덤 안에 안장하고 바삐 떠나갔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그리스도의 무덤에 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시에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일요일을 기념하여 ‘부활절’이라고 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기원이었습니다.
저는 은연중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이 몇 가지 방면의 의의가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의 답을 찾고자 저는 늘 읽던 누가복음 24장 1~9절을 재빨리 찾아서 작은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사람의 상상으로는 사람이 죽은 후 혼으로 되는데, 사람은 혼이 두려워서 거리감이 있다고 여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본 첫 반응은 역시 두려워하고 멀리하며 피하는 것일겁니다. 그러면 사람은 주 예수님과의 사이에 아주 큰 거리가 생길 것이고 또 사람을 단번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 구약시대에 데려갈 것입니다. 사실은 사람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처음 볼 때 역시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오히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여전히 아주 친절하게 느껴졌으며 두렵거나 낯설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원인입니까?
저는 자신도 모르게 누가복음 24장 36~43절을 펼쳤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의 영체를 보았을 때 마음속에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이 다 그분을 멀리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거리감이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심 끝에 형상이 없는 영이 아닌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계속하여 읽다 보니 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는 장면이 차츰차츰 저의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주님이 그렇게도 친절하게 느껴졌고 순식간에 주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느껴졌으며 마음도 아주 따뜻해졌습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자신도 그 시대에 살아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충동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시 제자들이 이 장면을 보았을때, 틀림없이 저보다 주님의 사랑스러움을 더 느꼈을 것이고 잃었다가 다시 얻게 되는 그런 기쁨은 더욱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여전히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뼈와 살이 있으며 사람과 함께 먹고 마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의 주 예수님과 똑같았으므로 사람은 또 다시 주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다시는 두렵다거나 낯선 느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또 다시 주 예수님이 육신으로 있을 때와 같은 그런 친밀한 관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이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기대와 염려,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살뜰한 보살핌과 관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람에게 나타난 의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의의를 알기 위해 저는 평소에 특별히 즐겨보는 책 한 권을 꺼내었습니다. 한 단락 말씀이 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부활 후의 예수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 자신을 보게 하고 또한 자신의 존재를 실증하고,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그 사실도 실증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자신이 육신 가운데서 역사했던 기간의 사람들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었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음에서 부활한 일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인류를 구속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후의 예수가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사람들에게 나타난 그 사실로 인해, 사람은 은혜시대에 단단히 고착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수의 ‘사라짐’이나 ‘말없이 떠나간’ 것으로 인해 지나간 시대, 즉 율법시대로 되돌아가지 않게 되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가 행한 사역을 준수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은혜시대의 사역은 정식으로 국면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있던 인류도 그때부터 정식으로 율법에서 나와 새로운 기원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가 부활 후에 사람에게 나타난 여러 방면의 의의이다.』
이런 말씀들을 저는 기타 영적 서적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거기에서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의의를 밝혔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상고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율법시대의 사람을 진정으로 조항과 규칙의 속박에서 이끌어내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부활한 이 사실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주 예수의 모든 사역을 다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주 예수님이 은혜시대에서의 사역이 정식으로 서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만약 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성육신의 사역이 사탄에게 매몰되어 예수님이 성육신 기간에 한 사역과 발표한 모든 진리를 사람은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 저는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왜 특별히 도마에게 나타나 그에게 못 자국을 만지게 했을까?’라는 문제를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20장26~29절에서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도하며 반복적으로 이 구절을 읽으며 열심히 상고해서야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부활전의 예수님의 실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모두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각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마음 상태에 대하여 완전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마의 본성 실질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도마의 마음속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역사 하시는 기간 동안 주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고, 또한 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볼 때는 죽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도마 같은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이 부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저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마를 심복구복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도마에게 그 분의 몸에 있는 못 자국을 만지게 했던 것입니다. 도마는 주 예수님이 문을 사이에 두고 잡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을 보고 또한 직접 주 예수의 못 자국을 만진 후에서야 주 예수님이 정말로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주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이라고 진정으로 믿게 되었고 더 이상 관념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이 도마에게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도마와 같은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긍휼이 있고 그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충분히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이 부류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과 역사에서 주 예수님이 곧 말씀이 육신 되신 그리스도임을 믿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이 말씀에서 주님은 도마와 같은 사람에게 책망을 좀 했고 도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진정으로 주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기회를 영원히 잃었고 또한 그리스도께 온전케되는 기회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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